문화

다자이 오사무 VS 미시마 유키오 - 우울은 타고나는 것인가?

bagopeum 2022. 8. 2.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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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우울할 때 보면 더 우울해지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울했던 그의 삶을 자살로 마무리 한다.  동시대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부고에 '그런 개같은 성격이 문제라서 그 인간은 자살한 거다.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자살했을 리가 없다'라고 폭언을 했다.  와 완전 나쁜놈아냐 미시마 유키오는 이미 다자이의 자살 전에도 그의 작품을 틈틈히 비판해왔다. 재밌는 건 정작 그런 말을 한 미시마 유키오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할복자살. 이를 두고 평론가들은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 오사무를 '동족 혐오' 했다고 평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역작이라고 찬양하는 인간실격을 나는 굉장히 지루하게 읽었다. 무엇보다 요조가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작품 속의 요조의 우울은 자가당착,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같다. 자기가 우울한 생각을 하고 우울한 생각에 우울해 한다. 그럼 우울한 생각을 안하면 되잖아? 공사장 가서 막노동 한판 뛰어보지 그랬어  솔직히 얼마나 팔자가 편하면 하루종일 저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할까. 아무래도 나는 다자이 오사무랑 안맞는 인간인가 싶었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미시마 유키오를 접하고 나서 난 미시마에게 진한 동족의 향기를 느꼈다. 원래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사회적 위치와 명예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래서 예측해 보건데 미시마는 다자이를 동족 혐오 한게 아니라 나처럼 진짜로 답답해 했을 것이다. 미시마는 처음에는 다자이의 작품을 높이 평가 했는데 그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문인이 하루하루 자기비판적 생각에 시달리며 작품에 점점 무겁고 난해한 우울의 정서를 보란듯이 깔아두는게 보기 싫었을 것이다.  

 

또한 평론가들은 미시마와 다자이가 둘 다 자살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동족이라 평가하는데, 미시마의 자살과 다자이의 자살은 너무 다르지 않나? 다자이의 자살은 삶의 비관에서 비롯된 자살이다. 자기 파괴와 자기소멸만을 목적에 둔 자살. 그러나 미시마의 자살은 아주 투쟁적이고 능동적인 자살을 했다. 그것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정치적 목표를 위해!  그는 헌법 개정을 위해 자위대가 궐기할 것을 외치며 자살한 것이다. 이렇게 능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자살이 어디있는가. 자살이란 아주 자기파괴적인 행위조차 어떤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이라니... 정말 독하다... 

 

 

인간실격보다 사양이 더 재밌으니 꼭 읽어보세용!

 

 

이렇듯 난 두사람을 동족 취급하는 문학계의 평가에 아주 반대하는 편이다. 이 둘이 자주 묶이는 이유는 생전의 디스도 있지만 서로 태어난 배경도 비슷하다는 건데 둘다 대단한 금수저였다. 그냥 금수저가 아니라 권력까지 쥔 정치인 집안이었다. 다만 다자이는 아마 집안에서 계급간의 차이를 목격하고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비관을 키워갔다고 한다. 이 세상이 가장 지옥같은 이유는 당연히 계급간의 불평등이니까. 감수성이 뛰어난 다자이에게는 빈자들의 고통과 부자들의 오만, 그리고 그 차이가 더욱더 비극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재밌게 읽은 미시마 유키오 책들 봄눈/금색

 

비슷한 금수저 집안이었던 미시마는 오히려 어릴 때 약한 몸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았는데 이를 통해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운게 아닌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대항할 힘과 용기를 키웠다고 한다. 후에 그는 실제로 약한 신체를 극복하고 강해진다. 다자이와 미시마가 절대 동족이 아니고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은 이 성장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둘의 상반되는 생애를 비교해보다가 얼마전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며 각 의사들에게 들었던 흥미로운 말들이 생각났다. 암, 당뇨 심지어 정신병까지도 타고나는 부분이 굉장히 크다고 한다. 특히나 우울증, 공황장애의 경우도 가족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처음엔 의사들의 말이래도 '에이 그런게 어딨어' 하고 말았지만 이들의 각자 일관성 있고 서로 다른 생애를 실제로 읽어 보니 진짜 우울과 에너지란 것은 타고나는가 싶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두 사람 중 한사람은 타인의 아픔에 고통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집안의 조력을 발판삼아 더 윗 계급의 사람으로 올라섰다. 한사람은 생 내내 우울해하고 슬퍼하고 작품에 이러한 정서를 솔직하고 절절하게 표현했지만, 다른 사람은 다양한 경험으로 얻은 신비한 상상력과 유려한 필체를 작품 전반에 녹여내었다. 비슷한 가문에서 태어나 글쓰기라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동시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삶의 전반적인 정서가 다른 것은 아마 두 사람이 가진 우울과 에너지의 크기가 확연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행복과 슬픔

 

 

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난 베르테르가 로테가 아니었더라도 어떤 다른 모종의 이유로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기 내내 그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감정 변화가 요란했으니까. 아무리 주위가 행복으로 가득차 있어도 그는 단 한톨의 슬픔과 비극을 발견하고 우울해 했을 것이다. 마치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처럼. 

 

조금 비판적으로 말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난 다자이도, 베르테르도 둘 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진정한 공감과 연대로 타인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정신병의 시대에 사람들이 다자이의 작품에 많은 공감을 얻는 이유가 그런 데에 있지 않을까? 다자이의 작품 속에 영원히 녹아있을 공감과 동정, 사랑의 정서가 독자들에게 모두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건 그의 삶 자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타고난 것이라면, 즉 삶에서 느끼는 우울 마저 타고난 것이라면 
우울을 타고난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끼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는 성정 역시 타고난 것이라면 애초에 태어날 때 부터 행복할 인간과 우울할 인간이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비극을 겪어야할 사람과 희극 속에서만 살아야할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것. 어쩌면 다자이가 성장과정에서 본 게 부자와 빈자만의 격차뿐만아니라 우울한 자와 우울하지 않은 자의 격차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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