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화 조커(2019)가 인셀들의 영화라고? 미친소리하네

bagopeum 2022. 8. 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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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탄생시켰던 영화 조커에 대해 내 주변인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영화가 묘하게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여 그들의 범죄를 옹호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또 실제로 한 인셀이 자기를 조커라고 칭하며 무차별적인 총기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가 나왔을 때 많은 영화 비평가들이 이런 점을 지적했었다. 전문가들은 특히 조커가 요즘 현대사회에 가장 문제 현상 중 하나로 언급되는 인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영화라고 혹평했다. 조커가 증오 범죄에 서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조커를 거의 20번 본 나는 이러한 주장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커가 왜 폭력적인 영화지? 도대체 어디가 증오 범죄를 정당화 한다는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조커가 어느 부분에서 인셀이라는 거지?


조커를 제대로 본 사람은 조커를 보고 감히 인셀이란 생각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우선 조커는 여자 못만난다고 징징거리는 멍청이들(aka 인셀)에 대한 영화가 아닌 계급에 대한 영화다. 영화 속 아서가 겪는 폭력들은 우리 사회 속 극빈층이 겪는 고통들과 맞닿아있다. 보편적으로 겪는 불친절과 병이 있음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점 등이 그렇다. 인셀들이 저런 비참하고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가?

지들이 아서처럼 맞기를 했어 엄마를 홀로 부양하기를 해ㅋㅋㅋㅋㅋ



혹자들은 인셀들과 아서 플렉이 가해자와 피해자, 두 면모를 동시에 가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도 하는데 이는 명백히 개소리이다. 인셀들은 순수한 가해자며 아서 플렉은 피해자다. 둘의 공통점이란 뒷마당 쥐며느리 다리 굵기만큼도 없다. 아서 플렉은 인셀과 접점이라고는 없는 캐릭터다. 또한 아서 플렉이 저지른 범죄가 증오 범죄와 무차별 테러라는 사람도 있는데 아서는 특정 집단을 혐오하거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서 플렉의 캐릭터성에는 어떠한 혐오 서사도 없다.

인셀이란 ?



아서 플렉의 '조커'가 자기자신을 대변한다고 나불거리는 인셀들을 참교육하기 위해 한번 제대로 따져보자. 우선 인셀의 정의는 비자발적 연애주의자(involuntarily celibate)로 연애와 섹스가 너무나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말하는 단어이다. 이들은 '연애와 섹스를 하지 못함'이 자신들이 입은 막대한 피해라고 생각하고, 여자들이 '자신들의 호감을 거부하는 행위'가 자기들에게 저질러지는 끔찍한 가해라고 망상한다. 그리고 이렇게 피해자인 자신들이 가해자인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따라서 정당하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러나 선후관계가 잘못댔다. 인셀들은 여성들에게 거절당해서 여성을 혐오하게 된것이 아니라 여성을 혐호하기에 여성들에게 '거절'당했다는 망상을 하는 것이다.

아서 플렉이 여성혐오를 도대체 언제 했냐고



인셀들이 여성들을 혐오한다는 근거는 그들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게 여성은 일단 인격체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집에서는 방구석 황제로 엄마를 노예처럼 부리면서 살고, 학교에서는 질낮은 찐따들하고 일본 포르노를 보며 꼴에 남자라고 여자를 상대로 찌질한 음담패설을 일삼았다.


그런 이들에게 여성이란 자기가 행패부리고 막대했던 엄마처럼, 자신이 열심히 소비하던 일본 포르노 속 배우들처럼 자신에게 순종적이고 자신의 고백에 더 큰 호의와 감사로 보답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자인 자신의 대시를 거절한다. 거기다가 돈없고 못생기고 키작고 능력도 없고 인간성도 떨어지지만 '착하고 진국'인 자신들의 진가를 못알아보고 돈많고 잘생기고 능력있고 매너좋고 인간성 좋은 남자들만 좋아하는 '악행'을 벌인다고 콧김을 뿜으며 분노한다. 호의랑 친절 맡겨놨냐? 여자들도 생존 본능이 있는 인간인지라 딱봐도 여자를 사람은 커녕 생물로도 안보는 빡대가리들은 근처만 와도 짜증이 난다.


그런데 영화 속 아서가 저런 양심과 뇌를 엿바꿔 먹은 태도를 단 한번이라도 보인적이 있던가? 아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낮잡아보고 무시하지 않았다. 타인을 자신의 저질스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엄마도 열심히 돌봤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병이 있지만 그것에 크게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자신과 소피와의 데이트가 자신의 망상이란 걸 깨닫고서도 그녀를 해치지 않았다. 인셀이라면 이 나쁜 ㄴ이 감히 나를 무시해!!!!(갑자기요..?) 하면서 소피를 죽였을 걸.


아서가 살인을 저지르는 맥락이 증오범죄와 비슷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죽여도 된다'라는 정서가 팽배해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과연 아서는 과연 단순히 '싫어하기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 속에서 아서가 죽인 사람들은 총 5명이다. 자신을 집단 폭행한 금융남 3인, 아동학대 가해자인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조롱거리삼은 머레이. 이 중에서 그 누구도 아서에게 가해자가 아닌 사람들은 없었다. 심지어 인셀들처럼 자의식과잉에서 비롯된 뻔뻔한 피해주장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명백하게 피해를 봤다. 아서가 쏜 총은 모두 반격의 총탄이다. 피해망상 무능력충이 아무 잘못도 없는 약자들을 향해 쏜 총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서는 인셀과 다르게 개리와 소피를 비롯한 무고한 약자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조커가 인셀이랑 머리카락 하나라도 같았다면 이 분들이 가장 먼저 죽었겠지.


조커는 계급에 관한 영화


조커는 계급에 관한 영화다. 정신병과 조커라는 키워드만 빼고 본다면 아서의 정체성은 무질서한 도시의 극빈층이라고 할 수 있다.


슈퍼 쥐 때문에 빈자들의 삶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토마스 웨인은 슈퍼 쥐는 슈퍼 고양이로 잡으면 된다고 농담을 한다. 그런 세상에서 죽음에 관한 조크를 했다고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된다고 아서를 '가르치는' 패널들에게 아서는 얼마나 환멸과 절망을 느꼈을까. 빈자들의 힘든 삶을 농담거리 삼고, 자신의 병을 조롱거리 삼는 건 괜찮지만 그저 언어유희로 하는 죽음에 관한 농담은 안된다...?


아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순간부터 각성한 것 같다. 원래는 이즈음에서 자살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을 바꾸고 금융남들을 자신이 죽였음을 밝힌다. 머레이는 더욱 더 엄중한 태도로 아서를 꾸짖으며 아서를 더욱 흥분시킨다. 머레이의 말에 '코미디는 주관적인거다'라고 아서는 좀 엉뚱한 소리를 하는데 이 말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불평등의 정의가 담겨있다.

코미디는 주관적인거다
Comedy is subjective Murray.


맞다. '재밌음'의 기준은 모두 부자들에게 맞춰져 있다. 빈자들에게 슈퍼 쥐는 괴로운 삶의 고통인데 부자들에겐 그저 농담거리이다. 빈자들에게 금융남 3인의 죽음은 통쾌한 일이지만 부자들에겐 추모해야할 슬픈 일이다. 사회는 부자들의 기준에 맞춰 재밌음을 평가한다. 이러한 불평등은 지금까지 아서가 살았던 삶과 금융남 3인의 죽음에 대한 사회의 태도와 다시 맞물린다.


금융남 3인이 무고한 사람 성희롱하고 폭행하다 뒤진거에는 그렇게들 슬퍼하면서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겪었던 폭행, 학대, 조롱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슬퍼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없다. 상담사의 말이 생각난다. '당신같은 사람한테는 아무도 관심 없어요. 나같은 사람한테도요(They don't give a shit about people like you, Arthur. And they really don't give a shit about people like me either)' 사회는 웃긴 것과 웃기지 않은 것을 정하고 조롱거리 삼을 사람과 동정 받을 사람까지 정한다. 이러한 사회의 모순 속에서 아서는 삶이 비극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물론 아서는 처음부터 삶이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웃음을 못참는 병을 가졌지만, 자신의 웃음이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힘든 가정환경이지만 코미디언이 되기위해서도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조크에 웃지 않는다. 그들이 웃는건 오로지 자신을 조롱거리 삼을 때만이다. 이에 아서는 결심한다. 웃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을 웃겨주기는 싫다. 대신에 내가 웃겠다. 누가 불쾌하건 말건 이제는 거리낌 없이 웃을 것이다.

활짝 웃는 아서



웃는 장애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그는 이제 그의 타고난 웃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울면 나 혼자 울지만 웃으면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는다. 실제로 아서는 활짝 웃는 것을 선택했고 덕분에 온 세상이 그와 같이 웃었다. 비록 광기에 서린 웃음이지만.


감독은 트럼프의 시대에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건지 몰라도 이 이야기는 정신병자에 대한 이야기 라고 하는 둥 애매모호한 말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래 시나리오를 볼때 감독은 확실히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보인다. 죽음을 가지고 농담하는 아서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그런 짓을 하면 안된다고 꾸짖지만, 정작 현실의 삶에서 고통받는 빈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조롱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이 여기고 등한시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들이 조커인줄 아는 멍청한 인셀들은 알아야한다. 니들은 아서 플렉이 아니라 금융남 3명과 랜달이다. 약자에게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주변 사람들을 낮잡아보고 조롱하는데 도가 터있는 사회의 병폐 그 자체. 따라서 인셀들은 조커처럼 흑화하고 각성하는게 아니라 금융남 3명과 랜달처럼 아서한테 뒤지게 쳐맞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야 한다. 안녕히가세요^^


인셀들아 니네들이 이입해야 될 사람은 아서가 아니라 얘네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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