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천명관의 고래가 너무 좋다!

bagopeum 2022. 6. 1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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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책을 읽기 전 한국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식견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나한테 한국문학은 읽기보다는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주인공 내면묘사가 많은 소설들이 그랬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혼자 아무도 하지 않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좀먹고 파먹는 인간상들이 나왔다. 외부에서 살짝만 충격을 줘도 내부에 서사가 몰아치는, 가만히 앉아서 끊임없이 우울한 생각에 빠져 비이성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극히 수동적이고 소심할뿐인 인간상. 

이런 인물상을 극대화하면 아마 다자이 오사무가 쓴 <인간 실격>의 주인공이 나올 것이다. 요조는 어떤 작가의 말처럼 그냥 가벼운 운동이면 나을 우울증을 방치해 혼란을 만들어낸다. 그 혼란이 인간으로서 공감이 가는 혼란도 아니다. 그냥 왜저렇게 사는지 답답할 뿐이다. 이 책에 공감을 한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난 얼마나 배가 부르면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며 살까 싶었다. 막말로 일을 좀 하던가 운동을 하면 몸이 힘들어서 그런 생각할 겨를 조차 없다. 육체에 먼지가 쌓여 게을러지니 게으른 영혼과 정신이 깃드는거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답답하고 짜증나고 공감안가는 주인공 내면의 갈등따윈 없고 재밌고 정신을 쏙 빼놓는 거대한 서사가 담겨있다. 공간적 배경에 향토적인 냄새가 물씬 나지만 동시에 이질적이고 낯설다. 아마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적 배경 또한 판타지와 현실을 교묘하게 섞어놓는다. 여기가 어디고 언제지? 하는 의문이 묘하게 생기는 찰나 간접적으로 시간적 배경을 암시하는 단서들을 던져준다. 독자들은 그것을 보고 추리할 뿐 더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덕분에 읽는 내내 하나도 혼란스럽지 않고 명쾌하고 박진감있었다. 

또한 알파벳으로 요약되거나 어설프게 세련된 이름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각자 개성있는 이름을 단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선장수, 애꾸, 쌍둥이, 약장수 등... 실명이 나오는 것은 오직 몇몇일 뿐이다. 재밌었던건 그들이 본인 이름에 아주 충실하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 인물들의 특징은 사람들의 후각, 청각, 미각, 시각, 촉각 모두를 자극하는 것이어서 나도 내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펼치며 읽을 수 있었다. 간만에 책 하나로 모든 게 만족되었다. 소설이 이래야지!!!!!

이 소설에서 내 최애는 춘희인데 그건 아마 내가 지금까지 본 소설속 인물 중 가장 순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말못하는 벙어리로 태어났지만 그 누구보다 오감이 발달한 그녀는 이 세상을 누구보다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색욕, 물욕이 많고 세상물정에 훤한 그녀의 엄마와는 너무 다르다. 모녀는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소통다운 소통을 하지 않는다. 그냥 춘희는 엄마를 관찰하고 조용히 사랑할 뿐이다. 그외에도 춘희가 누명을 쓰고 겪는 일들은 춘희라는 순수한 인물을 통해 필터링 되어 독자와의 거리가 벌려진다. 따라서 작가가 아무리 현실적으로 묘사를 했어도 동시에 판타지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워낙 서사가 빠르고 역동적이어서 그런지 책을 견딘다는 느낌없이 그저 재밌게 읽었다. 다른 일을 하는 와중에도 책이 계속 생각나고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너무 궁금했다. 펜트하우스 다음화도 이 책의 다음장보다는 궁금하지 않았을껄? 

끝에 결말에 다다랐을 때는.... 정말.. .완주한 느낌이었다. 아쉬운것도, 엥 이게 끝? 이런 것도 없이 모든 서사가 흡족하게 막을 내렸다. 소설 속의 모든 세계는 결말과 함께 희미하게 사라진다. 동시에 허무함도 든다. 그 복작복작하고 험난했던 여정들이 모두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니.. 그러나 그 과정에 춘희가 함께해서 아름답기도 하다. 춘희야 말로 이 모든 세속적인 것들과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에필로그에는 이제 남겨진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역사에서 남겨진 사람들이 아닌 우연히 그 없어진 세계를 발견한 사람들. 이미 그 남은 세계들은 춘희가 떠나보냈고 또 마지막 남겨진 세계마저 춘희와 함께 떠났기 때문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 세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전혀 그 세계와는 다른 허구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게 시계는 영원히 시공간에 은폐된채 간직된다. 

이 책을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우울증은 병이라고는 하지만 병에는 심리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괜히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이 있을까? 머릿 속에서 쓸데없는 세계를 펼치는 걸 그만두고 주변을 둘러봤으면 좋겠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가 남들한테 배려받지 못해서, 소외감을 느껴서 우울해졌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 수록 타인한테 극히 관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세상 만사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일 것이다. 자기의 자아만큼 남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니 우울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 좁디좁은 세상에서 나와 더 넓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제 세계로 나올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너 혼자만 힘든게 아니다. 세상에는 더 많은 비극들이 존재하고 그런 비극들을 감당하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다들 타인의 고통을 보고 공감하며 남들과 같이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굉장히 따뜻하면서도 시니컬한데, 이런 묘한 시각이 주는 것도 좋았다. 참고로 이 작가의 작품은 모두 섭렵했으니 차근차근 독후감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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